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 (Exit through the gift shop) 올 여름 기이한 제목의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사실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작년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한참 뒤에 개봉했다. 그것도 단관개봉. 아무래도 일반 상업 영화와는 달리 다큐멘터리인데다 국내에는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래피티(벽화) 아티스트에 관한 이야기라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혹시 이 영화를 감독한 뱅시(Banksy)라는 인물을 잘 모를 수도 있다. (사실 잘 몰라도 된다.) 하지만 본 영화와 관련이 있으니 간략하게 소개해보겠다. 뱅시라는 사람은 현재 가장 재기발랄하고 신선한 그래피티 아티스트 중 한 사람이자, 현대미술계를 강타한 소위 잘나가는 작가다. 정치 사회적 이슈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벽과 거리에 그리고 설치하는 영국 작가로 작업의 성격상 신분을 철저히 숨겨야 하는 일종의 테러리스트인 셈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 뱅시를 위시한 여러 그래피티 아티스트를 뒤쫓는 한 카메라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티에리라는 카메라맨은 그래피티 아트에 관심을 갖고, 이들을 뒤쫓아 여러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행적을 무조건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수많은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을 담던 티에리는 저명한 뱅시에게 까지 연결이 되어 친분을 쌓고 그래서 아주 소중한 영상들을 담아낸다. 그러다 뱅시의 제안으로 지금까지의 영상들을 하나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려는 티에리는 스스로 아티스트가 된 마냥 자신도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되길 꿈꾼다. 여기서 그는 미스터 브래인워시 라는 필명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자신의 인맥과 지금껏 봐온 아티스트들의 활동을 토대로 정식 작가로 데뷔한다. 여기서 충격적인 것은 그가 만들어내는 작품들이(스스로 직접 그리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무 계획 없이 기획하고 알바생들에게 명령하는 수준의 것들이) 소위 저명한 팝아트 작가들의 겉모양을 흉내 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앞뒤 없이 뛰어든 가짜 작가의 작품은 모두 비싼 가격에 팔려나간다. 평단의 호평과 함께.
예술 작품의 기준이라는 것이 워낙 모호하지만, 혹은 예술이라는 것이 취향이라는 개인적인 잣대로 쉽게 호불호가 갈리지만, 그 와중에도 객관적인 미적 관점과 역사적인 관점이 항상 동반되기 마련이다. 즉, 미학이라는 것이 아름다움을 정의하는 일종의 철학이라고 볼 때, 이에 부합한 작품 혹은 이에 근거한 행위는 감히 예술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예술의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지는 현대의 예술계에서 새로운 시도나 기성세대에 대한 전복과 같이 도전적이고 신선한 작품 혹은 행위 역시 우리는 예술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부연설명 역시 모호하기 짝이 없지만, 아무튼, 이 영화 속 주인공인 티에리, 미스터 브레인워시의 작품들은 어디선가 본 것 같으며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다. 물론 이 역시 필자의 주관적 영역이지만, 이 영화를 보다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태생부터 이것이 진짜 예술, 진짜 고민하고 투신하여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의 결과물과는 거리가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이런 영화,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과 미디어의 권력에 나풀거리는 요즘 예술계의 작태가 이 영화에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광고를 많이 한다고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많이 팔렸다고 좋은 작가라 할 수 없다. 그 작품이 비싸다고 좋다고 할 수 없다. 故백남준 작가께서는 예술이 사기라고 했다지만, 돈 벌려고, 유명해지려고 아무것이나 베껴내는, 아니, 베끼라고 시키는 행위가 예술이 될 수는 없다. 모방이 습작으로서 많은 도움은 되겠지만, 그 의도와 목적이 빗나간 순간 진짜 사기가 되는 것이다. 즉, 돈과 유명세에 가치를 두고, 누군가의 것을 베끼고 눈속임하는 것들은 예술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부동산 투기마냥 사고, 팔고 있다면, 과연 진짜 영혼이 담긴 예술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얼마 전 청담동 송은 아트스페이스에 갔다가 근처의 갤러리들을 둘러봤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오** 갤러리라는 거대한 상업화랑에서 바로 이 미스터 브레인워시의 작품을 만났다. 그것도 키스 해링과 바스키아의 작품 곁에 걸려있었다. 아, 이 허무맹랑한 작가의 말도 안 되는 작품이 얼마나 비싸게, 여기 한국에까지 와서 팔리고 있단 말인가. 필자는 그 화랑 앞에서 뱅시의 영화를 상영하고 싶을 정도였다. 과연 이 화랑은, 이곳의 주인은, 이곳의 큐레이터, 학예사, 혹은 이곳의 손님마저 이 작품, 이 작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 지 의심스러웠다. 사기와 무지가 판치는 세상임을 통감하며 한편으로 필자도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미스터 브레인워시의 작품을 괜찮은 예술 작품으로 인정했을까 라고 자문했다.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무리 양보하고 다시 들여다봐도 별로다. 그리고 이런 것이 묵인되는 이곳이나 이 사람들이 별로다. 게다가 지금껏 이런 작태가 얼마나 많았을까 란 생각도 들었다. 모두 의심해야할 판이다. 斜月

북경 후통(胡同) 골목 어느 한적한 노천카페에서 한숨 돌리며 맥주를 한 모금 마시는데, 건너편 카페에서 주인장인 듯 보이는 짧은 머리 아저씨가 기타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것도 클래식 기타를 말이다. 혹시나 하여 들어보니, 한 소절 넘기기가 힘든 것이 이제 막 기타를 잡았나보다. 하지만, 그 어설픈 기타 소리에 왠지 마음이 짠했다. 굳이 남녀를 구분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기타를 잡은 사나이의 마음이란 것은...... 사회주의나 문화혁명이나 대학 동아리나 로망스나 김마스터나 뭐 이런 것까지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기분 좋은 이야기를 담아낸다. 어젯밤에도 두어 명의 취객 정도는 혼자서 흠씬 두들겨 보냈을 법한 인물이 틀림없지만, 뭔가에 집중한 저 조그맣게 오므린 입술에서 이미 ‘당신은 분명 천국행이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소년에 집착하는 일상이다 보니 모든 것이 소년으로 귀결되는 나날이다. 斜月

‘더폴’ The Fall (2006)이란 영화가 있다. 비슷한 제목의 ‘더셀’ The Cell (2000)이란 영화로 나름 유명세를 떨친 인도출신의 영화 감독 타셈 싱의 야심작이다. 국내에는 ‘더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이란 제목으로 몇몇 극장에서 개봉했던 것으로 알고 있고, DVD로도 출시되었다. 그리고 인터넷을 뒤져보면 쉽사리 이 영화에 관한 포스팅을 발견할 수 있으며 몇몇 스틸컷과 짧은 예고편도 감상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이 영화를 접한다면, 우선 타셈 싱 감독의 신선하고도 장엄한 이미지를 발견할 것이다. 물론 와이드 스크린으로 봐야만 일백 프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훌륭한 사운드 시스템이 뒷받침 된다면, 영화에 삽입된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의 매력을 짧게나마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영상과 음악이 훌륭하다.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필자는 그런 누구나 언급하는 그런 거 말고, 이 영화의 주제에 대해 몇 자 적고자 한다. 주제라기엔 좀 거창하지만, 아니, 더 거창하게 이 영화를 만든 목적이랄까. 신념이랄까. 혹은 이 영화를 일종의 예술 작품이라고 봤을 때, 이 영화를 만든 작가의 의도, 의의, 주제 의식, 더 깊게는 그의 철학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 굳이 토를 달자면, 다른 블로거들이나 기자들, 혹은 평론가들이 이 영화의 이미지만을 설명하는, 이미지만을 높이 평가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억울하기까지 하다. 사족이지만, 여기서 이미지란 영상에 국한된다. 외형, 겉모습 같은.)
예를 들어 어느 클럽에서 한 여성을 발견했다. 이 여성은 오늘 이 클럽 안에서 외모가 가장 출중한 여성이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말이다.) 그래서 모든 늑대가 꼬이기 시작한다. 바텐더는 물론 밖에 서있는 클럽문지기들마저 이 여성에게 혹하여 정신이 나갔다고 치자. 그런데 정작 이 여성은 외롭다. 왜냐하면, 다들 이 여인의 내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친해지고 술 한잔하면 (어쩌면 다음날 아침에서야...) 그녀의 고민과 관심사가 순수하게! 궁금해질 수도 있겠지만, 장님이나 동성이 아니고서야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여자가 있기는 할까 싶지만, 아무튼 이런 허무맹랑한 비유를 들어 소개한 여인이 바로 ‘더폴’이란 영화다. 즉, 다들 겉모습에만 집중하는 것 같다. 다들 영상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녀의 내면은 무시당하고 그래서 이 영화는, 이 영화를 좋아하는 필자조차 외롭다.
서두가 너무 길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영화 자체에 대한 존경을 담은 작품이다. 조금 더 풀이하면, 영화의 탄생과 역사를 아우르는, 영화의 존재 자체에 대해 경배하고자 하는 작품이다. 우선 영화 속 이미지(영상)를 토대로 언급해 보자. 초반에 등장하는 뒤집힌 말 그림자와 눈을 번갈아 깜빡이며 이미지의 위치가 바뀌는 장면은 렌즈의 탄생을 의미한다. 렌즈의 탄생은 사진의 탄생을 거쳐 연속된 사진, 즉 영상의 탄생을 의미한다. 이외에도 빛과 그림자에 대한 집착은 영화 전반에 녹아있다. 초반에 흑백으로 시작된 장면이 칼라로 넘어가는 것, 각기 다른 장소의 소리와 소리가 겹쳐지는 것 역시 영화의 역사다. 하지만 이 정도 잔기술을 소개하는 정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영화가 처음 시작하는 지점, 말하자면 기획 단계! 어느 시나리오 작가나 기획자, 제작자, 혹은 감독의 머릿속에서 처음 이야기가 탄생하는 순간, 그 과정을 아주 공들여 보여준다. 아주 작은 사물이나 현상에서 출발한 아이디어들, 예컨대 알렉산드리아라는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에서 출발한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 혹은 들고 있는 오렌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야기의 시작을 오렌지 빛 사막이라고 표현하는 부분, 나아가 모든 등장인물의 차림새와 성격과 관계들마저 개개인의 경험에 의한 상상의 시작임을 보여준다. 즉, 영화라는 것이 일종의 ‘공상’의 ‘이미지화’라는 사실을 직접 하나하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관객의 개입, 그 이후의 독자적 해체를 설명한다. 여기서 관객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관객도 될 수 있지만, 따끈따끈한 대본을 이제 막 읽어 내려가는 감독이나 배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여기서 관객의 개입은 이야기의 뼈대와 행간, 단어 하나하나에 보는 이의 경험과 상상이 덧입혀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단순한 관객의 개입을 넘어 작가는 개입된 관객에 따라 시나리오를 수정해 나간다. 이것은 바르트의 말처럼 텍스트를 통해 탄생한 작가와 독자에 의한 작가의 죽음(독자의 경험과 상상에 의해 재해석된 텍스트,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닌 텍스트)을 의미하는 수준이 아니다. 그런 이분법적이고 다소 공허한 분리가 아니라, 작가와 독자의 상호 자유로운 개입을 통해 새롭게 탄생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불가능할 것만 같은 쌍방향 공상의 시작을 의미한다. 마치 여러 사람이 같은 소재로 이어그리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혹은 주말드라마의 다음 편을 친구들과 함께 마음대로 상상해보는 것처럼. 눈을 감고 떠올린 상상력이 무한히 확장되고 구현되어, 다시 누군가의 눈을 통해 새롭게 상상되고, 결국에는 개개인을 벗어나 자유롭게 쪼개지고 모이고 다시 합쳐지는 지점. 바로 그 지점이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보면 마치 이 영화는 들뢰즈가 ‘시네마’에서 주장한 것을 영화 자체로 쉽게 다시 풀어낸 느낌마저 든다. 즉, 영화란 ‘인간의 부재’(감각, 정서, 지각처럼 스스로 가치를 지니며, 모든 체험을 초과하거나 초월하는 상태) 가운데 있는 세계라는 것. 그리고 이런 것들이 작동하는 소위 ‘내재면’(개인의 경험들이 펼쳐지고 그 위에 개념적인 사유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곳)이 결국 영화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영화는 인간의 지각을 넘어 다른 지각으로 나아가서는, 결국 발생 가능한 모든 지각(지각이란 단어가 어색하면 일종의 '깨달음'이라 칭해도 좋겠다.)이라는 점에서, 들뢰즈의 소위 ‘사유’ 개념도 들먹일 수 있겠다. (굳이 들뢰즈의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으나, 영화의 본질에 대해 이미 잘 정리해 놓았으며, 앞서 필자의 미흡한 설명은 그가 정리해 놓은 것을 조금 가져다 쓴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영화, ‘더폴’은 앞서 소개한 영화의 속성 중 ‘이미지’에 관한 속성을 풀이하는 데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이미지란 들뢰즈의 이미지와 상통한다. 굳이 정의하자면 '심상'에 가깝다.) 그랬다면 이 글은 아예 들뢰즈의 ‘시네마’를 열심히 풀이하고 끝내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필자가 제대로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면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영화의 내용, 줄거리 자체에 담겨있다. 감독은 수많은 영화인들이 영화의 역사를 살아오며 담고 싶어 했던 것들을 아우르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인류의 역사와도 같은 것이다. 사랑, 배신, 우정, 정의, 권력, 저항, 양심과 순리 등등. 이런 것들은 영화가 아니어도 어떤 매개체로든 표현되는, 모든 이야기, 모든 인류 선배들의 관심사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선생님이 제자에게, 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에게,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에게, 문명의 발전과 상관없이 변치 말아야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그런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영화라는 매체와 상관이 없다. 이건 매체나 장르, 남녀노소, 시대를 뛰어넘는 모든 인류의 화두 아닌가. 그래서 이 영화 ‘더폴’은 스스로 보여준다. 진정한 영화의 매력은 이런 모든 이야기에 다시 복합적으로 영웅담, 서사시, 모험담, 비극과 해피엔딩과 코미디를 한꺼번에 버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남녀노소 누구나 아주 재미있고 아름답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예술! 다름 아닌 영화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이는 단순히 오락적 가능성이 아니다. 이는 세상 모든 예술 작품, 예술 장르 중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효과적인 소통의 능력을 의미하며, 다른 모든 매체와 장르가 범접할 수 없는 영화라는 존재의 이유다.

‘더폴’에는 이외에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수많은 기술들이 담겨있다. 플래쉬백이나, 몽타주, 스톱모션 같은 기술들을 일부러 그 기법이 드러나도록 담고 있다. 게다가 확대해 보면 수많은 촬영 기법들, 클로즈업에서 롱숏, 로우 앵글에서 버즈 앵글, 달리나 부밍, 핸드헬드 등 온갖 기술들이 마치 무슨 매뉴얼마냥 죄다 등장한다. 심지어 영화의 제작자, 배우, 스턴트맨, 음악감독, 영사기 엔지니어가 한 배역으로써 등장할 뿐만 아니라, ‘시사회’마저 등장한다. 이건 분명히 영화에 대한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만든 것이다. (그래서 혹시 영화 강의를 위해 만든 것은 아닐까 란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제작자인 데이빗 핀처나 스파이크 존스는 이 영화를 강의 교재로 사용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영화의 환상적인 장면들이 모두 컴퓨터 그래픽이 아닌, 실제 장소라는 점을 증명하여 우리가 꿈꾸는 환타지, 공상이라는 것이 극장 밖, 실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18개국 26개 지역의 풍경과 건축물들은 환타지의 경계를 철저히 무너트리면서, 상상력이 확장될 때 느끼는 재미와 자연의 피조물인 인간으로써 느끼는 즐거운 희망마저 심어준다. 이는 마치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디스커버리 채널을 보면서 느끼는 자연의 신비함 같은 것이다. 나와 우주사이의 관계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 받은 것처럼. 이러한 증거들, 경이로운 공간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엔딩 크레딧의 기능이 명확히! 발휘된다는 점에서 마지막까지 이 영화는 스스로의 아카이브를 담은 일종의 개념 예술로 승화될 지경이다.
너무 지나친 해석과 찬양일색인 것 같지만, 이 정도쯤 해야 앞서 언급한 필자의 억울함, 이 영화의 외로움이 수그러들고, 한두 명이라도 더 볼 것 같다. 그리고 서두에 이 영화의 이미지 자체에 대한 부분은 언급하지 않기로 했는데,(여기서 이미지란 ‘심상’이 아니라, ‘그림’, ‘외형’을 의미한다. ‘심상’보다는 ‘인상’에 가깝다. 그녀의 얼굴 같은.) 아마도 언급을 하게 된다면 역시 찬양 일색의 장문이 될 것이며, 재수 없게도 몇몇의 미학자들이 또 다시 거론되지 않을까? 斜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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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序文)에 대해 |
예전에 미셸 푸코를 한동안 좋아하다가 그의 정치사회적 행보에 다소 실망하여 관심을 끊은 적이 있었다. 심지어 당시 읽고 있던 그의 명저, ‘성의 역사’를 내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오만방자하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우연히 접한 르몽드 어느 칼럼에서 그의 인간적인 부분에 조금 이끌리는 바람에 (물론 푸코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그의 저서들을 다시 읽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집구석 내 코딱지만한 서고를 뒤져보았지만, 역시 책들은 어디론가 사라지는 속성이 있는지, ‘감시와 처벌’ 외에 읽다 내버린 ‘성의 역사 2권’ 말고는 다른 책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숨은 건지, 누가 빌려간 건지 알 수 없으나, 책 사는 돈이 어찌 아까우랴 라는 다소 된장 같은 심정에서 서점으로 향해 그의 초기 저서, ‘광기의 역사’를 다시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게 왠걸, 서점의 책꽂이에는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발간한 두 개의 ‘광기의 역사’가 놓여있었다. 번역자도 다르고, 가격도 다르고, 심지어 서문도 달랐다. 이를 어쩐다.
한 권은 내가 오래 전에 구입했던 그 책의 재 판본이었고, 나머지는 양장으로 새롭게 출간된 새 번역본이었다. 나는 적당히 두 책을 비교하기로 하고 작가 서문, 즉 푸코가 직접 쓴 서문을 읽어가는데 당황스럽게도 두 책의 서문이 아예 달랐다. 오래 전에 구입했던 책의 서문은 예전 그대로 푸코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쓸 때의 그 서문이었다. 그리고 양장본의 새 번역본에는 재발매에 맞춰 쓴 새로운 서문, 말하자면 과거의 서문을 지우고 쓴 새 서문이었다. 게다가 그 서문은 시간상 푸코가 이미 왕성한 사회활동(?)을 시작한 이후에 쓰여진 것이었다. 쉽게 말해, 한껏 콧대가 높아진 이후라고나 할까? (푸코의 성격이 또한 그렇다.) 물론 이 또한 나름의 가치가 있겠으나, 두어 페이지를 읽다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첫 번째 책, 최초 서문을 간직한 구 버전을 구입했다. 그의 오래 전 서문은 젊은 시절의 풋풋함은 아니더라도 패기라던가 날카로움이 더 묻어나는 의기에 찬 그것이었다. 더불어 서문 자체로서도 굉장히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구입할 때, 혹은 책을 볼 때 서문을 읽는 지 궁금하다. 반드시 읽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나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서문만으로 같은 책을 저울질할 정도라면. (여기서 서문이란 작가가 직접 쓴 머리글도 포함되지만, 출판사나 평론가들의 손을 빌린 서평도 포함된다.) 대개 서문에는 이 책의 요약이 들어간다. 그리고 이 책을 쓰게 된 동기, 혹은 이 책의 의의 같은 것들이 간단 명료하게 담긴다. 이 서문을 통해 독자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끔 서문을 열어보면 간혹 본문보다 훌륭한 경우가 있다. (이건 어쩌면 비극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앞서 언급한 푸코의 ‘광기의 역사’ 역시 서문이 참으로 훌륭하다. 물론 개인적 취향이라 왜 훌륭한 지에 대해 따로 언급은 하지 않겠다. 언젠가 어느 지인의 권유로 읽은 천명관 작가의 ‘고래’ 역시 그랬다. 권유해준 지인 역시 이 작품의 서문을 읽어보라고 했을 정도였는데 신경숙 작가의 서평이었다. 비록 간결한 글에 불과했지만, 읽고 나서 ‘아, 나도 이렇게 쓰고 싶다.’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신경숙씨의 글은 좋았다. 또 기억을 더듬어 보면, 서머셋 모옴의 ‘인간의 굴레’ 서문도 기억에 남는다. 그 간단 명료하고 겸손하면서도 할말 다하는 소위 쿨한 서문은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이상문학상 작품집의 엣 서문들, ‘작품 선정의 이유’ 같은 것도 참 좋았다. 요즘은 작품선정의 변이 갈수록 짧아지는 것 같지만, 오래 전 이어령씨의 서평들은 내게 마치 이 책을 잘 산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끔 했으니까.
책을 손에 든 순간, 서문부터 읽을 필요는 없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굳이 서문을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 다만, 가끔 보석처럼 빛나는 서문들을 발견할 때면, 왠지 누군가 이 서문을 그냥 지나치고만 말 것 같아 괜히 마음 졸이며 아쉬울 때가 있다. 斜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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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전시를 보고 온 며칠 뒤 문득.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샤갈처럼 열심히 연애하고 사랑하고 이것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길고 긴 그의 생애만큼이나 지루하리만치 종이 위에 그리고 석판화 동판화 스테인드 글라스 우화 신화 성경 이것 저것 손대지 않은 게 없을 정도로 색채의 마술사답게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그렸는데, 그래서 뭐지?
그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참으로 장수한 작가이다. 활동한 기간을 보면 이건 뭐 피카소에 견줄 정도다. 진심 부럽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는 참 격동의 세월을 잘도 지낸 것 같다.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미소냉전, 베트남전쟁, 중동전쟁, 남미분쟁, 등등. 그 외에도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지들의 독립 운동, 볼셰비키, 68혁명, 문화혁명, 알제리 전쟁, 스페인 내전, 달착륙, 우드스탁, 비틀즈, 엘비스, 마틴 루터 킹, 고다르, 구로사와 아키라, 등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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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뒤져보면 또 알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 내 소심한 심미안으로는 적어도 샤갈은 이런 것들에 크나큰 관심은 없었던 것 같다. 여기서 이런 것들이란 축구나 록음악도 들어가지만, 전쟁이나 억압, 또는 의식의 변화나 개혁, 혹은 이에 반하는 여러 운동이나 현상들도 포함된다. 적어도 그의 그림만을 놓고 보면, 분명 그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그의 그림 속에서 당시의 사회상이나 그만의 세대를 느낄 수 있는 훌륭한 눈이나 마음이 부족한 지도 모른다. 아니면 정작 사회상이 담긴 작품들을 아직 접하지 못했거나, 전쟁에 하도 채이고 채여 사회의 흐름 따위 완전히 외면해버렸거나, 이도 아니면 자신의 작품은 사회와는 무관한 별개의 창작 활동이라는 순진한 고집을 끝끝내 유지한 것인가. 어쩌면 마치 (조금 극단적이지만) 서정주가 군부에 알랑거리며 애새끼들이 죽던 말던 아름다운 시를 써 내려간 것과 유사한 케이스 아닐까? (그는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정부의 미술사업에도 잠시 몸담았었다고 하지만, 타의에 의한 억지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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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란
- 2011.07.22
- 14:26:38
난,, 작가는 기본적으로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그것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기 위해 고뇌하며 몸부림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 작가의 존재의 이유이며 본분이기에.. 결국 작가도 한 사람의 개인이고, 그 작품도 그 출발은 자기 만족에서부터니까..
자신의 작품활동을 연명하기 위한 현실적 타협, 현실적 외면으로 보이는, 아니 진정 그러했든간에 그건 일단 이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실을 비관한 나머지, 타협하고 공존하느니 차라리 숨어버리는 게 낫다고 붓을 꺾어 버리는 작가보다는 오히려 친일, 혹은 현실 외면으로 보이는 샤갈과 같은, 그래도 나름의 주체할 수 없는 예술적 욕망을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표현해 내려고 하는 작가의 예술혼이 더 절실히 뜨겁다..
그래서 그 근원적인 차원에서 봤을때, 현실에 맞서며 현실을 대변하는 지성으로서의 목소리를 내는 작가는 또 다른 성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실과 동떨어져 때론 현실과 타협했다고 하여 그 작가의 순수한 작가적 열망마저 무시해버리는 것은 왠지 슬프다..
어찌보면 그네들은 그렇게라도 해야 자신의 작가적 역마살을 끌고 나갈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건 그네들에게 숨쉬기 위한 생존 그 자체의, 눈물겨운 개인의 문제는 아니었을까..
너무 비약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가까이는... 식민지 시대에 단지 친일이라는 이름에 묶여, 순수한 작가로서의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한 우리의 문학인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나도 오래전부터의 막연한 동경이었던.. 맘 만이라도 기타치는 소년이 되어볼까나..
기타 갈쳐주~~~
이 사진 참 좋당.. 풀어 놓은 글은 물론이고^^